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슈미트 (문단 편집) === 정치입문 === 종전 후 1945년 슈미트는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에 입당하였다. 서독에서 우파 정치인들은 1949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지도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었던 반면, 지하 조직이 건재했던 사민당은 독일이 항복한지 두어달만에 조직을 재건했다. 과거에 나치에서 출세하려다가 유대인 혈통 때문에 좌절했던 슈미트는 이번에는 신속하게 사민당에 입당했고, 덕분에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이미 사민당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진 청년 정치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온 슈미트는 [[함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함부르크 대학교에는 Staatswissenschaft, 즉 국가학이라는 전공이 있었는데, 이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법학과 경제학의 융합전공이었다. 슈미트는 바로 이 Staatswissenschaft를 전공하였다.] 특히 당시 함부르크대 교수였던 칼 쉴러(Karl Schiller)의 총애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칼 쉴러는 교직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민당 소속의 정치가로도 활동했는데, 그는 당시 당내 기반이 약했던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이 되면서 사민당의 지도부로 성장해 나간 인물이었다. 칼 쉴러는 자신의 제자인 슈미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슈미트가 당내에서 고속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여담으로 칼 쉴러와 헬무트 슈미트는 사제지간이지만 나이 차이는 7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슈미트가 21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8세에 수용소에서 풀려나 대학에 들어간 반면, 칼 쉴러는 만24세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수재였고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슈미트는 1947년 독일 사회주의자 학생 동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 의장이 되면서 사민당 내에서 청년 선두 주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49년 경제학 디플롬(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칼 쉴러 밑에서 함부르크 시청 경제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52년 칼 쉴러 밑에서 [[함부르크]]시 경제교통부 간부가 되었다. 1952년 이후 칼 쉴러가 빌리 브란트의 핵심 측근이 되자 슈미트도 함께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1953년 [[독일 연방의회|연방하원]]에 당선되었다. 1957년 사민당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58년 사민당 국가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1년부터는 함부르크시정회로 자리를 옮겨, 함부르크시청에서 제2인자인 내부참사관(Innensenator)으로 일하였다. 1962년 2월 16일과 17일에 엘베강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월권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재난대책을 진두지휘하고 경찰과 군병력을 신속히 투입하여 함부르크시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줄였다. 딱부러진 일처리,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호리호리하고 핸섬한 외모로 매스컴을 통해 그는 이때부터 전국적인 명성과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1963년에는 독일 내 수구반공세력들에게 내란음모자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등 곤욕을 치렀으나, 1965년에 무혐의로 수사가 종결되었다. 1965년에는 다시 연방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행정경험과 탁월한 정치 감각,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슈미트는 사민당의 브레인으로 활동했다. 1968년부터 연방사민당의 부의장직을 맡기 시작했다.[* 슈미트는 그 후 연방사민당 부의장직을 1984년까지 연임하였다.] 그리고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자 '당연히' 내각에 입각하였다. 빌리 브란트 정권 초기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1972년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스승 칼 쉴러가 경제 정책을 두고 빌리 브란트 총리와 대립하다가 결국 브란트에 경제 정책에 항의하며 사퇴를 하자, 쉴러의 후임으로 슈미트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슈미트는 스승 쉴러와 마찬가지로 브란트 총리와는 상당한 성향 차이가 있던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 슈미트는 쉴러와 마찬가지로 사민당에서 상당히 우파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되어 왔고 때문에 사민당 내에서 비주류였고 적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슈미트는 브란트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전임자이자 스승인 쉴러와 마찬가지로 브란트 총리와 잦은 마찰을 빚어왔다. 대표적으로 슈미트는 브란트의 핵심 정책인 [[동방정책]](Neue Ostpolitik)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했다. 슈미트는 동방정책 자체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브란트 총리가 너무 성급하게 동방정책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경제 원조는 서독의 이익보다 동독과 소련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준다고 비판해 왔다. 특히 재무장관으로서 슈미트는 강력한 분배 정책을 추구하는 브란트와 여러 마찰을 빚어왔다. 함부르크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함부르크]] 시청 경제통상부에서 경력을 쌓아왔던 관료 출신 슈미트는 경제 정책에 대한 나름의 주관이 확고했기 때문에 브란트 총리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특히 슈미트는 브란트 총리가 경제 문제를 항상 정치적으로 다루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자주 표출했다. 그래도 브란트 총리와 인간적으로 갈등한 것은 아니었고, 브란트 총리가 귄터 기욤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을 선택할 때도 본인이 후임 총리로 가장 유력한 상황임에도 브란트의 사임을 강력하게 만류한 각료 중 한 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